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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의 청포도》 리뷰
2023-01-26

《칠월의 청포도》 리뷰

시 분석의 늪에서 나온 날 -칠월의 청포도를 읽고

시는 머리로 해석하는 거야.

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작가가 누구인지 몰라도 주어진 활자에 충실하게 분석해서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정답을 찾아가도록 가르치면 된다. 배우지 않은 작품을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기만 하면 된다. 어떤 순서로 어떻게 접근하면 좋은지 요령껏 가르쳐 주면 좋은 선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능에 출제될 가능성이 있는 현대시가 1만 편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20년 전의 일이었으니 그사이 얼마나 많은 작품이 탄생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치지 않고도 시를 해석할 원리만 잘 가르치면 되는 게 내가 처한 현실이다.


시는 아무나 쓸 수 있지만,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은, 시를 가르칠 때, 종종 인용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그 시대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진단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된 것을 꾸짖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외압에도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육사는 시대의 파수꾼이었음이 분명하다.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의 정체를 간파하되 그 문화에 동요되거나 휩쓸리지 않았던 육사. 중국에서는 군사 훈련을 이수하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아왔다.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은 쉽지. 하지만 실천이 없는 글은 결국 현실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건 먹으로 쓴 거짓에 불과하다.”는 문장은 체험에서 얻은 경험이 이육사가 남긴 글들의 근본이었음을 잘 드러내 준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당대 현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해하려면 이육사가 살아갔던 시대를 조금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고 식민 통치가 익숙해질 뿐만 아니라 언론조차도 친일 기사만 쏟아내는 현실 속에서 반일이나 독립은 말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되었다. 백화점과 다방, 주점, 댄스홀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향락에 빠져 있었다는 진술은 그리 놀랍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의 일기를 정리하다가 ‘낙동강까지 북한군에 밀린 상태에서도 부산 지역은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며 향락에 빠진 젊은이들이 많다며 걱정하던 부분’을 읽으며 놀랐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쟁이 터져도 남의 일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일제 강점기를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이육사의 이런 실천적 삶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남겨진 자료를 토대로 저자의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옆에서 관찰한 분이 쓴 글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만족스러웠다. 민족시인으로 살아간 이육사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수험생을 위한 시 교육이라는 이상한 틀에 갇혀서 시를 잘못 가르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서 그의 시를 다시 한번 감상하게 되었다.





이원재

분당영덕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강의와 교지 발행에 힘쓰고 있습니다. 국어를 잘하는 실마리가 정확한 문법 지식에 있음을 깨닫고, 많은 학생에게 문법 지식의 확충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문법을 지키며 생활하지만, 그 현상을 설명할 ‘단어’가 낯설어서 문법을 어려워한다는 점을 인식시키며, 우리 국어에 대한 자신감을 찾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